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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인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 동정 아닌 평등
    특수체육 2020. 3. 19. 10:23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어떤 환경에 있어서도 교육의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보다 교육적인 면, 생활여건이 앞서가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도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이로써 장애인들도 자신이 개발 가능한 모든 분야를 개선하고 연구하여 각 분야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특수체육은 88 서울 패럴림픽 이후부터 많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정규대학과정에서 특수체육을 교과목으로 운영하고, 전공학과를 개설하였습니다. 교육에 앞서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관계를 알아봅시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먼저 '장애인'과 '정상인'이라는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정상인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에 비해 우월하거나 문제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단어는 인격적인 차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최근에는 언어적 인격 차원에서,, 그리고 학문 용어, 방송용어로써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장애인을 동정으로 보느냐, 평등으로 보느냐입니다.동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장애인 복지 측면이나 인각적인 도리에서 장애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장애인에게 편견을 의식하게 하고, 서로 간에 거리를 느끼게 하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복지나 편리라는 명분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평등'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는 장애인을 길거리나 운동장으로 불러 나오게 하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격 없이 함께 생활하고, 공감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직 동정의 범주에서 맴돌고 있는 듯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외국과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장애인 운동회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장애인체육대회를 진행하는 데 한 편에서는 운동회를 지켜보는 관중 수가 많고, 그들의 응원과 박수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는 침울한 분위기에서 운동회가 진행되고, 관중도 얼마 없습니다. 그리고 운동회에 참여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여기저기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에 대한 의식 차이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장애인을 평등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연민 그리고 측은함에 눈물을 흘리는 동정의 시각(편견)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나 장애인을 돕는 것도 평등의 시선이어야 한다.

     지하철 입구에 구걸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차림새가 어려워보이고 뇌성마비 증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구걸 행각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곤 할 것입니다. 아마 다수의 사람들이 측은한 마음과 동정의 마음으로 작은 돈이 로 나마 온정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면서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빈민가를 찾는 복지가의 발걸음이 그럴 것입니다. 장애인을 돕는 일도 이런 관점에서 시작됐을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며 '어렵겠다', '측은하다' 라는 생각에서 그들을 돕는 것일 겁니다. 장애인 복지시설을 만들고, 생계를 돕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물론 장애인을 바라보며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 생계가 어려운 장애인에게 식품을 나눠주거나 복지관을 만들어 장애인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등 모든 일들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꼭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장애인을 바라보고 도움을 줄 때 우리의 행동과 언어, 뉘앙스가 그들이 우리와 대등하고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희망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평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생활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활방법에서 조금씩의 차이만 있다는 것입니다. 비장애인의 생활방식이 개인에 따라 다르듯이 장애인의 생활방식도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눈이 나빠 안경을 쓰거나 귀가 안들려 보청기를 쓰는 것,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에 의존하는 것 모두 정상적이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등의 시각은 장애인을 보고 측은한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안경을 착용한 사람을 바라보듯 무심히 바라보는 초연한 마음입니다.

     평소 장애인들과 잘 소통하고 평등하게 사는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에게 "오늘 저녁노을이 참 아름답군요."라고 과감하게 얘기하며, "들에 핀 빨간 장미꽃이 유난히 아름답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평등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러한 질문이 시각장애인에게 실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서로는 평등의 관계에서 일상을 주고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들의 요구

     장애인들은 치료와 교육 받을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복지를 요구하기 이전에 치료와 교육을 주장하는 것은 평등한 삶의 권리를 찾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비장애인이 누리고 있는 권리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여건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시설은 그들만을 위한 혜택이 아닙니다. 비장애인보다 편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라 비장애인의 일을 장애인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수시설은 장애인들의 특혜가 아니라,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길거리 신호등은 비장애인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설이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길거리에 불빛 신호등만 설치하는 것은 비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지만 시각장애인의 권리는 여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방법은 음향기기를 신호등에 설치하는 것입니다. 계단 옆에 경사로를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계단이 비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설치되었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의 편의도 생각되어야 마땅합니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도 도로에 점자블록을 만들거나 건널목 신호등에 음향장치를 설치하는 등 장애인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시설들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턱 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평등의 시각으로 장애인을 바라볼 때,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운동장을 뛸 수 있습니다. 동정의 시각으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운동을 할 수 없습니다. 동정의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할 경우, 그것은 장애인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장애인을 동정으로 바라보는 한 우리는 그들을 억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장애인임을 부각시키는 점들은 장애인을 학교나 사회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시각이 동정에 머물러 있는 한 장애인은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며, 침울한 운동회만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장애인이 눈에 띄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동정의 시각에서 평등의 시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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